‘가야 고분군’(Gaya Tumuli) 7개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17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45차 회의를 열어 ‘가야 고분군’의 세계유산 목록 기록을 최종 허가했습니다. 이번 포함은는 지난 2013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록 이후 약 10년 만에 이루어진 결정입니다. 하지만 위원회 의장국이었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이 발발하면서 위원회 개최를 잠정 연기해 등재 결정이 미뤄졌었습니다. 그러나 올해 러시아가 의장국 지위를 내려놓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의장국으로 결정되면서 지난 5월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유네스코 본부에 말이산 고분군을 비롯한 ‘가야 고분군’에 대한 세계 유산 ‘등재 권고’ 의견을 전달되었습니다.
[ 참고로, ‘UNESCO’는 세계유산은 세계문화유산과 세계자연유산, 이 둘의 장점을 서로 겹쳐 복합 유산으로 분류됩니다. 2021년 7월 기준으로 167개국 1,121건의 세계 유산이 기입되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연합국 교육청이 영국 런던에 교회 건설 개혁과 세계 평화를 상징하며, 국제기구를 창설하기로 했습니다, 2차 대전의 종전 후인 1945년 11월 16일 영국 영국에 모인 37개국 대표가 <유네스코 헌장>을 채용하여 등록했습니다. 194개국, 12개의 준회원이 있습니다. 준회원국은 모두의 속령입니다. 준회원국은 총회의 투표권이 있기 때문에 소수의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은 1950년 에 가입하였습니다. ]
‘가야고분(加耶古墳)’은 낙동강 중하류역, 남강 유역, 섬진강 부근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야는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존속하였습니다. 공간적 범위는 낙동강 중하류역과 남강 부근이 중심이지만, 가야 전성기인 5세기 후반 대~6세기 초엽 가야의 영향력은 섬진강 유역까지 이릅니다. 가야고분은 널무덤, 덧널 무덤, 구덩식돌덧널 무덤, 굴식돌방 무덤 등 계기적인 순으로 형식이 달라집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고성 송학동 고분군 등이 가야 세력의 유력 왕묘역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가야 고분군의 유네스코 평가
600년 고대 문명의 역사를 간직한 ‘가야 고분군’이 ‘UNESCO’ 세계 유산에 수록 되었습니다. 이로써 가야 고분군은 한국의 16번째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이전까지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등 13개의 문화유산과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갯벌 등 2개의 자연 유산이 기록되었습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가야 고분군에 대해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가야 고분군은 1~6세기 중엽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문명 가야의 고분군 7개로 이뤄진 연속 유산입니다.
가야의 7개 고분군은 *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 *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 *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군 * 경남 합천 옥전 고분군입니다. 문화재청, 외교부, 주’UNESCO’대한민국대표부, 지자체, 가야 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은 그동안 가야 고분군 세계 유산 기입을 위해 힘을 합쳐 노력해 왔습니다. 고분군은 2013년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기록되었고, 2020년 9월 최종 포함 신청 대상에 선정돼 2021년 1월 세계유산센터에 기입 신청서가 제출되었습니다. 유네스코 자문·심사기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현장 실사 등 심사 과정을 거쳐 지난 5월 ‘수록 권고’의견을 받으면서 등재가 확실시 되었었습니다.
가야 고분군의 역사
‘UNESCO’에 공식 등재된 한반도의 가야 관련 고분군 780여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중앙집권화된 국가 체계를 이루지 않고 공존했던 가야의 각 정치체는 지역마다 크고 작은 고분군을 만들었습니다. 고분군은 기원전후부터 대가야가 멸망하는 562년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이들 고분군에 건립된 고분은 수십 만기에 달하며, 가야 고분군은 사라진 가야 문명을 복원할 수 있는 데표적인 유적으로 입지, 경관, 묘제 변화, 매장 유물을 통해 가야 사회 구조와 변천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야고분군 형성기인 1~2세기에 조성된 고분 군집과 보존 유물은 가야의 존립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고분은 입지가 구분되지 않고 혼재되었으며, 지배층 고분은 목관 하부에 유물을 보존하는 별도 공간이 구성되기도 했습니다. 3~4세기는 왕과 지배층 고분으로 이뤄진 중심 고분군이 출현한 시점으로, 왕의 묘는 구릉 정상부 능선을 따라 줄지어 건립된 독특함이 있습니다. 목곽묘 안에는 교역으로 수입해온 물건 등 많은 유물들이 매장되었습니다. 이는 피장자의 부를 과시하거나 사후 안락을 염원하는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풀이되고 있습니다. 고분 입지, 규모, 매장 유물에서 가야의 사회 계층 구조를 엿볼 수 있으며, 이 시기 대표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입니다.
5세기는 가야 각지에서 정치 체제의 성장과 중심 고분군 확산이 이뤄진 떄입니다. 특히 고분군 건축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흙과 돌을 사용해 봉분을 높게 쌓아올린 고총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왕과 상위 지배층 무덤인 고총은 능선 정상부를 따라 줄지어 건립되고, 왕과 지배층 고분에는 장신구나 무기류 등 신분을 의미하는 고급 물품이 매장되었습니다. 순장자들을 각종 생활 용품과 함께 묻는 사례가 대부분이었지만 작은 무덤들은 유물이 적고 순장자가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특징이 없습니다.
이 시기 고분 입지와 규모, 보존 유물은 가야 사회의 계층 분화가 가속화 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5세기 후반에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 별도 왕릉 묘역이 형성되었습니다. 순장자기 40명 넘게 묻힌 고총도 만들어기 시작하였으며, 왕릉급 고총 출현은 대가야가 가야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고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릉급 고총 건립와 묘역 분리 현상은 가야가 고대 국가로 발전해가고 있던 증거라 할 수 있으며, 6세기 중엽인 562년 가야는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채 대가야를 끝으로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
가야 고분군에 대한 비전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유네스코(UNESCO)에 등재한 가야 고분군 세계유산 대해 “2013년 잠정 목록에 오른 이후 10여 년 동안 민·관·학이 함께 마음을 모아 이뤄낸 성공이”라며 “이번 세계유산위원회는 가야 고분군이 인접 국가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대한 증거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최 청장은 “앞으로 세계에서 인정받은 가야 고분군의 가치를 지키고 널리 홍보해 여러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세계 유산으로 만들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망를 나타냈습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기입을 결정하며 7개 고분군 내 민간 소유 부지를 확보해 유산 보호 노력을 지속하고 유산과 완충구역, 특히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사이에 난 도로로 인한 영향을 완화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또한, 7개 고분군 전 지역에 대한 홍보 전략 개발과 통합 점검 체계 구축, 지역 공동체 참여 확대도 권고하였습니다. 문화재청은 “이번 등록을 계기로 세계유산으로서 ‘가야 고분군’의 가치를 보존하고 지역과 사회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관할 지자체와 협력하며 최선의 지원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